주일낮설교(한영중)

서원을 통해 바라본 하나님나라

0 1,426 2017.02.03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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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상 1:10
한나가 마음이 괴로와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삼상 1:11
서원하여 가로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아보시고 나를 생각하시고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사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인생을 살다가 보면 때로는 우리 인간의 입장에서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결코 불행 꺼리가 아니다 는 것을 시간이 지난 후에 혹은 인격적으로 성숙한 후에 깨닫게 됩니다. 성숙하지 못 할 때는 불행한 상황과 환경과 여건을 불행으로만 단정 짓기에 불행 때문에 더욱 불행해 지게 됩니다. 그러나 인생의 고난을 섭렵하고, 고난의 강수를 통과한 후에 불행을 바라보고 조명하는 시각은 달라 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에게 주어진 불행은 불행으로만 국한 지울 수 없는, 아니  그 불행이 온전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축복의 통로가 되기에, 또한 그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모든 여건과환경이 성숙한 인격으로 빚어지는 복된 통로이기에 불행은 불행할 수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크고 작은 불행거리가 존재합니다. 불행에 대한 오해 중 한 가지는 나의 불행은 타인의 불행에 비하면 더욱더 크고 방대하고 감당할 수 없는 불행이라고 하는 오해입니다. 다른 사람의 떡이 커 보이는 경향과 동일한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이라는 현재적 상황을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의 계획, 혹은 공평하신 하나님의  입장)에서 바라본다면, 그 불행이 차등적이거나 혹은 편파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실 또한 성숙함으로 변화된 후의 인격에서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나의 인격이 성숙하지 못할 때, 어린 아이와 같았을 때는  불행이 자신에게만 주어진 불행으로 생각하는 경향들이 짙습니다. 그러나 성숙한 인생의 고백은 불행 속에 갇힌 자신 때문에 낙담하는 것이 아니라, 공평하신 하나님을 목소리 높여 송축하고 찬양하고 감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재 자신에게 주어진 어설픈 불행은 때문에, 탄식과 오열 혹은 낙심과 좌절의 나락에 머물지 않고, 현재 주어진 불행은 나의 삶에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결단의 통로가 되고, 비상하는 날개가 되며,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가는 기틀을 마련할 수 있는 축복의 기회라고 생각하고 받아들인다면 지혜로운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기에 충분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한나는 불행하다는 관점으로 조명해 볼 때 그녀는 분명 불행한 여인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여건과 환경에 노출된 한나라고 할지라도 성숙되고 인격적으로 성장한 하나님의 입장에서 조명해 볼 때 결코 불행 속에만 갇혀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나는 자신에게 주어진 불행한 형편과 처지 그리고 그러한 환경을 기도를 통해, 연약한 인간의 무능력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사모하고,그분을 갈망하고 열망하고, 소망하고, 희망하고, 대망하는 통로가 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오늘 본문 10절에 보니까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고(삼상1:10) 또한 11절에는 서원(삼상1:11) 했다고 했습니다. 한나가 기도하고 통곡한 후에 그녀의 결단은 서원하게 됩니다. 한나는 왜 서원하게 되었을까?  한나의 서원은 여러 가지 관점에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기도하며 통곡하는 한나는 그 기도와 통곡을 통해 인간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결론을 내립니다. 하나님만이 자신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유일하신 분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 인간이 인생의 한계점에 이를 때  의지할 유일한 방편은 하나님 한분 이십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이 이러한 사실을 깨달을 수 있도록 우리 인생을 코치하십니다. 


  여러분들 중에도 인생여정을 걸어오면서 수많은 풍지파란(風紙波蘭), 혹은 풍전등화(風前燈火)의 상황을 겪었을 것입니다. 그 위기의 순간마다, 위기를 탈출하게 하시고 극복하게 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분 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 그 누구도 나의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도움 자가 되고 위로 자는 될지언정  그 문제의 현장에서 명료하고 확실하게 해결해 줄 수 있는 분은 전능하신 하나님 한분뿐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한나의 기도를 통해  우리는 놀라운 한 가지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현재 한나에게 주어진  현실의 문제를 속 시원하게 명료하며 명쾌하게 해결해 주기 위한 탈출구 방편으로 하나님은 ‘서원’ 이라는 통로를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의 생사화복(生死華服)을 주장하시는 전능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때  하나님은 성도의 당면한 문제해결을 위한 또 한 가지 탈출구로 ‘서원’이라는 비밀통로를 설정해 놓았다는 것입니다. 한나의 마음을 사람들이 해결해 줄 수 없습니다. 심지어는  위로 자와 인도자라고  하는 엘리 제사장도  한나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14절의 말씀을 보면  간절하게 기도하고 통곡하는 한나를 향하는 엘리 제사장은 영감 서린  통찰력으로 그녀를 본 것이 아니라  인간적이고 , 현상적으로 나아가 영적인 무기력감으로 바라본 시선이  한나에 대한 오해를 불러 일으켰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네가 언제까지 취하여 있겠느냐! 포도주를 끊으라 하니”(1:14) 고 하며 한나를 술 취한 여인, 술을 마시고 술주정을 하는 부정한 여인으로 취급하고 맙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엘리 제사장은 물론 하거니와 이 시대에 하나님의 계시를 전하는 소위 제사장 이라는 직함을 가졌다면 거룩한 통찰력으로 하나님 백성의 피폐함과 영적 갈증을 해소하는 통로가 되어야 하며, 한나가 살았던 암울한 시대의 영적 어둠을 밝히고 걷어낼 수 있는, 꺼지지 않는 등불과 같은 존재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나 엘리 제사장은 거룩한 반열에 서서 이스라엘 백성의 곤고하고 피폐한 어두운 그림자를 걷어내기는 커녕, 영적 무능과 무감각으로 그의 인생 종국을 목이 부러져 사망하는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됩니다.

 적어도 엘리 제사장은 갈증하고 있는 한나에게 시원한 생수와 같은 존재는 아닐지라도, 그녀가 안고 있는 깊고 아린 상처를 더 이상 덧나게 해서야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이미 사사시대에 대한 결론적인 주제와 교훈을 숙지하고 있습니다.‘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이 왕이시지만 그 왕이신 하나님을 거부하고,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며,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작고 앏팍하고, 보잘것없는 경험과 경륜, 경력 등에 사로잡혀 하나님의 뜻을 거부해 버리는 참으로 암울한 시대상을 투영할 수 있습니다. 엘리의 추태와 방불한 그의 고백은 거룩한 통찰력을 상실한 무기력한 영적 지도자의 현주소가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이러한 엘리의 망발에 가까운 폭언은 이시대의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의 선포자로, 세움을 입은 풀타임 사역자들에게 대한 경종이요 나아가 경각심과 새롭게  각성해야 하는 하나님의 권고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엘리 선지자가 단순하게, 무턱대고 망발만 행치 않았다고 보아야 합니다. 엘리 선지자의 이러한 망언은 불꽃같은 눈동자로 살피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입장에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또 다른 각도에서 엘리 선지자가 가시적 상황을 보고 내뱉은 망발(?)이 그녀로 하여금 단 한순간도, 단  한식간도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릴 수 없게 하는, 채넬고정, 오직예수, 초보 운전자의 직진만 2~3시간(?) 의 하나님만을 사모하는 축복된 통로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조명을 해봅니다.


  때로는 우리 인생에 찌르는 가시와 같은 존재와  , 우리 인생의 연약하고 무기력한 핸디캡은 , 결단코 가시로만 ,결단코 무기력한 핸디캡으로만 남게 하지 않으시는 전능하신 찿을수 있습니다. 

  적어도 오늘 본문은 그녀가 격은 사면초과의 상황에서 불가항력적인 선택인 서원은 우리 인생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강력한 구속섭리가 내재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한나가 기도하고 통곡하는 가운데 , 알파 플러스해서 엘리의 망발을 통한  그녀가 불가항력적인 무조건적인 선택은 ‘서원’이라는 특유책 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선택은  궁지에 몰린 고양이에게 쫓긴 생쥐에 비유할 선택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의 계획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그녀가 ‘서원’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그러한 의지와 결단을 할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섭리라는데 동의를 금치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이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최고와 최선과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나가시면 성취하시는 분이십니다. 

 요나서 1장 1절로 2절에 이렇게 기록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아멘 요나 선지자는 적어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영적 감각을 소유한 선지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외면하고 인간적이고, 계산적인 자신의 의지와 결탁하여 외면합니다. 그리고 니느웨로 간 것이 아니라, 다시스로 가는 배를 무작정 승선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의 불순종이, 인간적이고 비인격적인 외면이 , 하나님의 뜻을 거슬러 버릴 수 있단 말인가? 아니! 인간의 불순종이 하나님의 뜻을 막아버리고, 포기 시켜버릴 수 있단 말인가?

 요나의 이러한 발상은 하나님의 대한 오해의 발단으로 시작 되었고, 인간의 배반과 무지의 소치(小癡)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전지(全知) 하심은 요나의 연약함 마저도, 수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나가 불순종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거슬러 버렸지만 , 하나님은 전지하심은  요나의 불순종함도, 그의 인간적인 생각과 , 세속역사관에 찌든 그의 모든 가치도 다 수용하고  섭리(계획)속에 포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때로는 우리 인생이 연약해서 혹은  무지해서 겪는 모든 삶의 정황의 배후에는 전지 하신 하나님의 배려가 있기에 하나님의 구속역사는 오늘도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어쩌면  한나의 불가항력적인 선택인 ‘서원’은  하나님의 열망이며 소원이며 꿈이며 희망이며 미래 비전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나를 통해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 언젠가는 반드시, 기필코, 결국에는, 종국에는 우리 인생을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하나님나라에 들어가기에 합당함을 얻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요? 서원은 자발적으로 엄숙히 하나님께 하는 서약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서원은 모두 자의적이며 경솔하게 한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서원은  한번 서원하면 절대로 깨트릴 수 없다는 사실을 (민30:2) 보여줍니다. 야곱이 그러했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이 함께 하여, 그리고 그에게 축복해 주신다면, 하나님 위해 그 성소를 세우고, 십일조를 바치기로 맹세하고 , 서원했습니다. (창 28:20-22).

 입다 는 싸움에 승리를 얻고, 개선할 수 있다면, 그가 만나는 최초의 사람을 희생으로서 바칠 것을 서원했습니다(삼상 11:30-40). 서원은 하나님께서 희망을 들어주신다면 이라는 조건하에 무언가를 하나님께 약속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걸음 더 나아가 또 하나의 서원은 이해관계를 떠난 하나님의 영광 위해 자기부정의 생활을 서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나실 인의 서원입니다. 그것은 포도주의 음용을 끊은 레갑인의 서원과 같은 것입니다. 나실 인의 서원은 극히 준엄한 생활을 하며, 족장들의 간소한 생활의 모범을 배우려 했습니다. 이것은 당시 가나안 사람에게서 채용한 농경문화의 사치생활의 저항이기도 했습니다. 

 엘리가 보는 한나는 포도주에 취한 그 당시 사사시대의 보편적인 여인으로 비췄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의 서원은 진실로 하나님의 거룩함에 동참하고픈, 구별되고 성별된 나실 인이 되기를 강력히 희망하는 서원이었습니다. 아니! 그녀의 서원은 평생 하나님께 거룩한 백성으로 구별되게 살기 희망하고, 자기의 소원의 옳은 데로 살기를 거부하는 거룩한 하나님 백성 됨의 고백이었습니다. 자신의 아들을 하나님께 드리겠다는 서원의 내면에는 남은 평생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룩히 살기 소망하는 간절한 소원이기도 했습니다. 한나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가야 하는 거룩한 백성으로 살기 위한 격조 높은 고백과 같은 것입니다.

 많이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구별된 거룩한 백성으로 살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간절한 소원을 이해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이끌어낸 목적을 거룩한 백성삼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한나가 하나님께 서원한 것은 이스라엘을 거룩한 백성으로 구별하고 보존하시려는 하나님의 마음을 읽어낸 것입니다.

  우리는 한나의 서원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또 다른
의미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한나로 하여금 통곡하고 기도하고 나아가 서원하게 한 의도가 무엇일까? 오늘 본문을 넘어 삼상 2장으로 넘어가면  한나는 하나님의 서원을 통해 신실하신 하나님의 언약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성취된다는 사실을 암시해주는 것입니다. 한나는 이러한 사실을 깨닫고 영광중에 계신 그 하나님을 찬양하게 됩니다. 한나가 통곡하고 기도하고 서원하는 동안  종국적으로 약속을 이행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왕  다윗을 세우고, 다윗이 거룩하시고 영존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섬기며, 경외하는 모습을 통해 하늘에 계신 하나님만이 우리의 왕이시다 는 사실을 만방에 알리신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섬겨야 할 왕은 누구이십니까. 그분은 바로 신실하신 약속으로 우리에게 찾아오신 만왕의 왕되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세우고 그를 통해, 전능하신 하나님을 찬송하고 경배할 것을 보게 하였습니다. 나아가 다윗을 통해 약속하신 메시야를 보내어 주시겠다는 신실하신 약속을 성취시키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신실 하십니다. 세상 끝날 까지 함께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셔서 한번하신 약속은 변개치 않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한나를 통해 기도하고 통곡하게 하시고 나아가 서원을 통해 아들 사무엘을 주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은 한나의 주어진 현재상황의 불행이 결코 불행만이 아니라 그 불행을 통해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불가항력적인 은혜를 주시려는 축복된 통로를 삼으셨다는 것입니다.
 
  한나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가야 하는 거룩한 백성으로 살기 위한 격조 높은 고백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왕 다윗을 세우고, 다윗을 통해 거룩하시고 영존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섬기며, 경외하는 모습을 투영하여  하늘에 계신 하나님만이 우리의 왕이시다는 사실을 만방에 알리시기를 원하십니다. 이러한 귀한 깨달음이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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