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설교(한영중)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

0 1,490 2017.02.03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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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15: 19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21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여러분 방금 전에 보신 동영상은 참으로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천신만고 끝에 얻은 늦둥이 아들이 친구들의 집단폭행에 의해 숨졌습니다. 경찰 관계자에 의하면 두부 골절과 가슴과 온몸에 발자국이  선명한 것을 보고서 당시 상황이 얼마나 처참했는가 하는 것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한번 죽은 아들은 다시 살아 돌아 올수 없는 길로 떠났습니다. 비명횡사한 아들의 죽음 앞에 부모도 뉴스를 시청하는 대한민국의 국민들도 마음이 아프고 쓰리긴 마찬가지입니다 중요한 것은  한번 죽은 아들은 다시 살아 돌아 올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은 한번 죽으면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사망의 늪에서 헤어나올 수 없는 것이 기정 사실입니다. 우리 인생의 문제가운데 가장 근원적이며 ,핵심적인 문제는 삶과 죽음의 문제입니다. 죽음의 문제 앞에는 그 누구도  시원스럽게 해결책을 내놓을 수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역사적으로 보아도 수많은 권력과 힘과 부를 가진 역대의 왕들이 가장 고심하던 문제는  바로 죽음의 문제를 회피하고 탈출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백방으로 방법을 찾고 전세계 곳곳에 자신의 신하를 보내어 문제해결을 위해 분주했지만 그것은 일장춘몽(一場春夢) 물거품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누구도 이 사망의 늪에서 헤어나올수 없는 인생최대의 사안입니다.  역사를 초월해 죽음의 문제는 해결할수 없는 난제중의 난제인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이러한 인생의 가장 심각한 문제의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다는데 놀라움을 금할기 없습니다.
 
오늘 본문 20절 말씀을 다시한번 읽으십시다.
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아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 했습니다. 고대사회의 벽화나 무덤 구조를 보면 부활(復活)에 대한 희망이나 소원이 간절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에집트의 미이라는 영원히 죽지 않는 영생을 소원하면서 부활을 기다리며 꿈꾸는 소원에서 미이라를 만든 것입니다. 중국 진나라 시황제의 무덤을 보십시오. 그 또한 영원한 영생과 부활을 소원했던 흔적이  무덤 곳곳에서 발견할수 있습니다. 더위기 진나라의 시황제는  그가 생존했을 때 영생초 불로장생초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신하들을 세계 처처곳곳에 보내어  영원히 살기 위한 발버둥을 친 흔적을 역사를 통해 고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이러한 노력과  수고에 아랑곳없이 추풍낙엽처럼 한결같이 죽음의 문턱 앞에 무릎을 꿇고 맙니다. 우리는 여기서 인생의 한계를 느끼는 정점(定點)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넘을 수 없는 한계점, 그것은 바로 죽음의 한계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사도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인생이 한계점이 죽음의 정점을 넘어선 부활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할렐루야!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우리 옆 사람에게 다시 한번 축복하십시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부활이 주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단지 예수님 자신 한분의 부활이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은 죄로 말미암아 사망의 왕 노릇하고 있는 모든 잠자는 자들의 열매가 된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예수님의 부활은  사망이 왕 노릇하는  모든 성도들의 희망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성도들을  칭해 잠자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일반적인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견해를 슬픔, 아픔, 고통, 눈물 등등으로 표현합니다.  물론 그렇습니다. 사망은 육신과 이별이며 나아가 정든 가족과 친구과 영원히 분리되는 일이기에 그러합니다. 그러나 성도들이 갖는 죽음의 견해는 예수님의 부활이전과 부활이후에는 현격하게 달라져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은 모든 성도들의 희망이 되신 것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희망을 사는 만큼 행복하고 즐거운 일이 없습니다.  희망을 가진 한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30대에 백만장자가 된 미국의 폴 마이어(Paul J. Meyer)라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을 폴마이어가 30대에 백만장자가 된 것을 부러워 하며 또한 신기함에 그 방법을 물었습니다. 그러자 폴 마이어는 이렇게 답합니다. " 여러분 !!여러분이 바라는 것을 글로 쓰세요. 그리고 강한 소원을 가지고 매일 매일 눈으로 보시면서 이것은 꼭 이루어진다고 마음에 그림을 그리며 살아가 십시요."

 놀라운 것은 그렇게 희망하고 소원하는 결과를 실천한 사람들의 90%가 넘는 사람이 실제 그 소원이 이루어졌다는 통계입니다. 세상 소원도 이루어지는데 하물며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기대와 소원이랴! 하나님은 빌립보서 2장13절을 통해 약속하십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즉 하나님은 우리에게 소원을 심어 주시고 그 소원이 이루어지도록 일하십니다. 그러기에 어떠한 영적 기대와 소망을 가지느냐가 매우 중요합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은 무엇입니까? 의, 식, 주의 세속적 소원이 아니라 모름지기 바울과 같은 영적인 기대와 소망을 품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우리 성도의 소망이 되신 것처럼  이제는 그 소망을 잃지 않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소망은 기대입니다. 소망이란 말에는 '기대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기대'란 말은  불가능한 일도 가능하리라고 믿는 것입니다.  사실 현재 실현 가능한 일,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을 기대하는 것은 기대가 아닙니다.  기대란 인간의 능력으로는 도무지 불가능한 일, 현재로서는 실현 가능성이 전혀 없는 일을 이루어질 줄로 믿고 확신하는 것이 기대입니다. 아브라함이 그러했습니다.

 (롬 4:18)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아브라함은 75세의 노인 때에 하나님으로부터 아들 약속을 받고 이 약속이 이루어질 줄로 소망하며 25년을 기다렸습니다. 그 결과 아브라함은 100세에 90세 된 아내를 통해 아들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기대입니다.

소망은 신뢰입니다 '소망 한다'는 말은 성경에서 '신뢰 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에게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시146:6절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시 146:5)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께 소망을 둘 때 왜 복 있는 자가됩니까 ?  그것은 하나님이 복의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든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의 작은 호흡 가닥 하나도 ,  우리의 일거수 일투족도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합니다. 오늘 성도가  소망을 가진다는 것은 견고하다는 뜻이 함께 합니다 '소망'에는 '견고하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견고하다는 말입니까? 하나님의 약속이 견고하다는 말입니다.
(롬 15:8) 내가 말하노니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위하여 할례의 추종자가 되셨으니 이는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들을 견고하게 하시고,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과 맺으신 언약 하나님의 약속을 결코 변개치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하실 수 없는 일이 두 가지 계신데 그중에 한 가지는 거짓말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의 약속은 결코 변치 않고 ,변경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연기 성경에서 말하는 ‘견고하다’ 라는 말은  하나님의 보좌를 가리킬 때 사용됩니다. 즉 하나님의 보좌는 견고함의 대명사입니다. 세상 임금과 통치자의 보좌는 아무리 길어도 수십 년을 지속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통치는 수백, 수천 아니 영원무궁 합니다. 이렇게 영원무궁토록 우주 만물과 인간 세상을 다스리고 통치하시기에 하나님의 보좌와 하나님의 통치에 소망을 두어야 그 소망이 허탄해지지 않습니다. 견고한 하늘 보좌에 소망을 두는 모두가 되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 22절을 함께 읽고 결론의 말씀을 삼습니다.
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새로운 희망과 꿈과 용기와 영생을 제공해 줍니다. 주님의 부활은 성도의 부활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놓고 생각해보면 부활이란 죽은 몸이 되살아나는 것만은 아닙니다.  어떤분이 165cm의 키에, 70kg의 몸무게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죽었다가 부활한다고 하면 죽기 전과 똑같은 모습으로, 키는 165cm에 몸무게는 70kg의 한국사람, 동양인의 모습으로 전과 똑같이 살아나는 것은 부활이 아닙니다.  부활이란 신령한 몸으로 살아나는 것을 말합니다. 

  죽었던 몸이 그대로, 예전의 모습대로 되살아나는 것은 회생이나, 소생, 회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죽은 사람을 살리신 사건이 세 번 기록되고 있는데, 그것은 회생, 소생, 회복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의 질서에 속하는 것으로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이 부활은 한 사람 개인의 입장에서 보면 육신의 연속성이 있고, 삶의 연속성이 있으니, 다시 살아났다는 말을 하지만, 단순한 회생이나 회복은 아닙니다.  죽은 몸이 살아났으나 예전의 몸이 아니라, 신령한 몸입니다.  죽을 몸이었는데, 죽지 아니할 몸으로, 썩을 몸이었는데 썩지 아니할 몸으로, 병들과 쇠약해지고 후패하는 몸이었는데, 영원히 쇠하지 않고, 썩지 않고 죽지 않을 몸으로 살아난 것입니다.  더 좋은 육신으로 부활하였습니다. 여러분 이러한 소망으로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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