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설교(한영중)

성 경:행 9:1~7 제 목:놀라운 변화

0 1,451 2017.02.03 10:20
성  경:행 9:1~7                                    제  목:놀라운 변화             

1.사울이 주의 제자들을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2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좇는 사람을 만나면 무론 남녀하고 결박하여 예      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3 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
  4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5 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6 네가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7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섰더라
 
  1 Meanwhile, Saul was still breathing out murderous threats against the Lord's disciples. He          went to the high priest
  2 and asked him for letters to the synagogues in Damascus, so that if he found any there who      belonged to the Way, whether men or women, he might take them as prisoners to Jerusalem.
  3 As he neared Damascus on his journey, suddenly a light from heaven flashed around him.
  4 He fell to the ground and heard a voice say to him, "Saul, Saul, why do you persecute me?"
  5 "Who are you, Lord?" Saul asked. "I am Jesus, whom you are persecuting," he replied.
  6 "Now get up and go into the city, and you will be told what you must do."
  7 The men traveling with Saul stood there speechless; they heard the sound but did not see      anyone.

  남아프리카에 사는 부족 중에 30세를 넘지 못하고 죽는, 수명이 아주 짧은 부족이 있었습니다.  과학자들이 원인을 조사해 본 결과, 그 부족이 사는 집주위에 토담이 있었는데 ,  토담 사이에 서식하고 있는 벌레들이 독소를 뿜기 때문이라는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과학자들은  이 독소를 맡으며 사는 사람들은 정상적으로 살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부족에게 생존할수 있는 3가지 방법을 알려 주었습니다.  그 첫 번째 방법은  살충제를 뿌려 벌레를 죽이는 방법입니다. 살충제로 독소를 내뿜는 벌레를 다 죽여 버리는 것입니다.  둘째는 벌레가 살고 있는 토담을 헐어 버리는 방법입니다.  벌레들이  사는 근거지를 헐어버리는 것입니다. 토담은 벌레들이 기생하기에 적합한 습도와 환경이 조성되어 있기 때문에  토담을 헐어버리면 더 이상 벌레들이살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셋번째는 부족들이 다른 곳으로 이주해 가는 방법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과학자들이  심혈을 기울여 3가지 생존 전략을 가르쳐 주었으나 그 부족은 살충제도 뿌리지 않고, 토담도 헐지 않고, 다른 곳으로 이주도 않고 그대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변화를 겁내며 계속해서 고집하며 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  그것은 변화를 두려워  하지 때문입니다.  그 변화를 두려 하는 것은 그들이 가진 전통적인 가치관 때문입니다.    우리 조상들이 이렇게 살았으니 우리도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하며 죽음의 길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그들에게 변화가 있다면  그들에게는 새로운 생명 연장의 축복이 기다리고 있는데 말입니다. 만일 그들이 변화된 삶을 산다면 보장된 미래가 있는데 말입니다.  변화는 결단과  용기가 필요합니다. 

  일반적인 사람은 살면서 변화를 두려워 합니다.  그리고 변화화기를 꺼려합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  그 가운데 한가지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내가 경험 하지 못한 , 세계에 대한 두려움 ,  내가 체험하지 못한 일에 대한 두려움 때문입니다.  내가 경험하지 못한 세계는 , 더 이상 수용이 불가능 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변화를 꺼려 하는 원인이 두려움 이고  , 그 두려움은 경험하지 못한 이유에서 온다면 , 경험은 변화를 추진할수 있는 원동력이 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하나님을 경험하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과 ,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한 가운데 , 신앙생활  하는 것은  변화의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경험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경험의 형태는 다양합니다. 자연속에서, 삶속에서 ,생활속에서 하나님을 느끼며 경험하는 일에서부터 , 사람과의 관계속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경험  , 특별히 , 말씀을 깨닫고  말씀을 실천하며 그 말씀이 , 우리의 삶속에서  성취되고 이루어 지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을 경험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경험하는 일에 대해 하나님을 아는 것, 이라고 표현합니다. 하나님을 안다 라는 것은 하나님을 경험적으로 아는 것입니다.  경험적인 앎은  인격적 관계의 토대위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은  인격적인 관계가 호전되고  , 개선되고 , 온바른 인격적 관계로 수정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경험하는 만큼 ,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아는 만큼 신앙의 성숙도도 높아져 갑니다.  그런 관점에서 우리의 신앙생활을 본다면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아가는데 힘쓰고 ,애쓰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1. 변화의 주체는 하나님이시다.

 오늘 본문 1절로 2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다함께 읽겠습니다  바울이 변화되기전의 상황을 묘사해 놓은 성경구절입니다.
 
 1 사울이 주의 제자들을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2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좇는 사람을 만나면 무론 남녀하고 결박하여 예      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1 Meanwhile, Saul was still breathing out murderous threats against the Lord's disciples. He          went to the high priest
  2 and asked him for letters to the synagogues in Damascus, so that if he found any there who      belonged to the Way, whether men or women, he might take them as prisoners to Jerusalem.
 

  바울이 하나님을 경험하기전에는 위협과 살기가 등등했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경험하기전에 신존재에 대한 잘못된 이해 구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오늘 이시대 많은 사람들이  신존재에 대한 분명하고 확실한 가치기준을 설정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과연 내가 믿는 하나님이 참 신인가 ?  라는 분명하고 명쾌한 해답을 가지고 있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이러한 신존재 증명의 부재로 말미암아  참 신이신 하나님을 경배하지 못한 상태에 놓여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행적으로 신존재에 대한 분명하고 확실한 가치를 설정해야 합니다.  여러분!  사람과 신 , 신과 사람이 분깃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  일반적으로 신이라고 한다면 사람이 가진 한계선상을 뛰어 넘는 것입니다.  사람과 신이 동등하다면 더 이상  , 그는 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과 사람의 분깃점은  사람의 가진 한계점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존재의 증명의 첫 번째 사안입니다.  성경은  사람의 존재에 대해서 유한적이라고 합니다.  유한적이라는 것은 제한적입니다.  한계를 가진 유한한 존재입니다.  , 신의 존재는 사람의 존재를 능가하고 뛰어넘고 ,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속성을 가진자라야 신이 될수 있습니다.  사람의 한계가 무엇입니까 ?  사람의 한계는 여러 가지 많은 한계가 있지만  그 가운데  가장 기본적인 요소는 죽음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죽음의 사선 앞에 무릎을 꿇을 수 밖에 없고 , 죽음 앞에 무기력해 지는 존재가 인간입니다.  사람은 죽음을 이겨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신은 죽음과 무관한것입니다.  죽음의 사선을 능히 넘을수 있는 자라야 신이 될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  그렇다면 이러한 신존재의 첫 번째 요건으로써 , 일반인들이  신이라고 여기는 자들을 한번 대입해 보십시오.  싯타르타 석가모니 , 공자 , 무하마드 , 등등 얼마나 많은 신들이  가장 기본적인 신존재의 대한 증명 앞에 무릎을 꿇고 말았습니까 ?    만일 이러한 기초를 염두에 둔다면 우리는 신존재에 대한  올바른 가치관을 정립하게 될것입니다.  그렇다면  신과 죽음은 상관이 없다 ,  신은 죽음이 신의 존재를 무기력 하게 할수 없다는 .  반면에 사람은 한계선상이 죽음이 왜 짓누를까 ?  사람이 죽음앞에 무기력한 반면에 신은  죽음과 상관없는 의연한 이유가 무엇일까 ?

  신학에서는  죽음과 상관이 없는 이러한 신의 속성에 관련해 “거룩성”이라고 명명합니다.  거룩이라는 말은 “성스럽과 위대하다”는 의미로 사전에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존재가 “ 성 스럽고 위대한 존재”로 말합니다.  그렇다면  좀더 구체적으로 “거룩성”에 대해 조명해 본다면  거룩성은  “ 죄와 상관이 없는...” “ 전혀 죄가 없는” “원래 죄가 없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결국  신 존재 증명에 있어 ,  거룩성은  죄와 상관이 없는 ,  원래적으로 죄가 없는 존재 라는 증명이 되는 것입니다.    신이 사람에 대한 공의를 행할수 있는 근거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신은 사람을 심판할수 있고 , 재판할수 있는 명백한 근거는 바로 “거룩성” 때문입니다.
 
  신이 죽음과 상관이 없다는 것은  “ 거룩성”에  근거한 “영원성”입니다.  출애급 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 지어다” 는 번복된 말씀의 의미와 뜻속에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원하심이 우리 인간에게도 부여되고 회복 되기 원하는 하나님의 열망이며 소원이며 간절한 기대 , 하나님의 마음이라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거룩은 단지  도덕적으로  선한 삶만을 추구하는 것을 넘어서 , 하나님의 백성으로써 거룩한 삶을 열망하고 그 하나님을 닮아가고 , 종국적으로 하나님나라에 들어가기에 합당함을 얻으며 ,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히 하나님을 찬송하고 경배하기 위함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을 찬송해야할  이유에 대해 골로세서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골1:22입니다.

[골 1 : 22]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라고 했습니다. 
22 But now he has reconciled you by Christ's physical body through death to present you holy in his sight, without blemish and free from accusation--

  NIV 는 좀더 명쾌 하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을 찬양해야 할 당위성에 대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말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의 죽음은 화목을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화목의 원인은 원수가 되었기에 화해를 시키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화해의 재물로 예수 그리스도를  화목재물로 드렸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생은 죄 때문에  하나님과 원수된 인생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원수된 원흉이 무엇입니까 ?  죄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싫어 하십니다.  죄와 상관 없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싫어하시는 이유는 ,  하나님의 백성이  거룩하게 살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기대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어떤 문제로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죽음앞에 무기력한  인간은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고 , 자칭  신이라고 자부하는 우상으로 떠 받들리는 자들도  죽음 앞에 무너지는 것을 볼때 ,  죄의 문제는 해결자가 아님을 깨닫습니다.  그들 또한 종교의 탈을 섰지만  무기력한 인간에 불과한 것입니다.  결국 죽음의 문제 ,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한분은 죄와 상관이 없으신 거룩하신 하나님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땅에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땅에 오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골1:22은 세가지를 회복하기를 원하다고 말합니다  그 첫 번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holy in his sight, “그의 시각 안에서 거룩함”을 말합니다.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시각 안에서 거룩함 ,  하나님의 관점에서의 죄없음 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나라에 들어 가기에 합당함을 얻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결국 세상은 하나님에 의해 영위 됩니다.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우주와 만물을 통치하시고  만왕의 왕으로 좌정하십니다. 사람이 아니라고 해도 하나님께서 OK 하시면 ,  만사 OK입니다,  사람들이 다 맞고  옳다고 해도 , 하나님께서 NO 하면  NO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자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또한 NIV는 without blemish  흠, 결점을 없이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and free from accusation--  그리고 비난으로부터 자유롭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죄에 문제에 관련하여 누가 ‘비난’ 하고 ‘정죄’ 합니까 ?  이미 거룩하시고 죄와 상관이 없으신 재판관이신 하나님께 심판을 받은 악한 ‘마귀’입니다.  마귀는 할수만 있으면  하나님의 백성을  ‘비난’하고 ‘정죄’하려고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  심판자 이신 하나님께  그들의 죄를 물어 지옥으로 떨어지게 할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자 하나님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 이러한 모든 악한 원수 마귀의 ‘비난’과 ‘정죄’를  한순간에  종식 시켜 버렸습니다.    할렐루야!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할 분명한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돌아가면  바울은  구약의 메시야 ,  그 메시야의 강림에 대한 혼란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마스커스 ,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분명 예수님은 십자가에  사형선고를 받고 죽었는데 ,  분명 장사 되었는데 , 돌무덤에 갖혔는데 ...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셔서  바울에게 나타나신 것입니다. 구약에 정통하고  선지서의 능통한 바울은 충격이었습니다.  죽음의 한계를 넘을수 있는 사람은  이세상에 절대로 존재하지 않는다 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 죽음의 한계 선상을 넘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현현하셔서  자신앞에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분명하고 확실하게 신분을 밝히신 것입니다.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오늘 본문 4절의 말씀을 함께 읽습니다.

  4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5 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4 He fell to the ground and heard a voice say to him, "Saul, Saul, why do you persecute me?"
  5 "Who are you, Lord?" Saul asked. "I am Jesus, whom you are persecuting," he replied.
 
 
    아멘 !   

  바울이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난 것은 ‘충격’ 그 차제 였습니다.  더욱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관련한 소식은 이미 듣고 있었고 ,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추종하는 무리들을  핍박하고 , 죽이는 일에 앞장 선것도  예수 그리스도는 나사렛에 난 한 청년에 불과 하다는 인식이 충만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 그의 생각이 그가 오래동안 신뢰해 왔던 , 그 가치관이 무너진 것입니다.  바울은  눈앞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만났고  직접 예수 그리스도로 부터 신분에 대한 소리를 들음으로 그앞에 엎드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고 난 후 , 그는 변화되었습니다.  그의 가치관이 변화되었습니다.  그의 삶이 변화되었습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이 인생 목표가 달라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추종하고 그를 따르는 자들을 박해하고 핍박하던 바울이 ,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증거하는 증인으로 삶이 바뀐 것입니다.  오늘 본문 15절의 말씀을 보면 ,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할지에 대한 분명한  인생 목표가 설정되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15절입니다. 

15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16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15 But the Lord said to Ananias, "Go! This man is my chosen instrument to carry my name before the Gentiles and their kings and before the people of Israel.
16 I will show him how much he must suffer for my name."
 
아멘  바울에게 주어진 mission은  그의 앞날에 예상치 않은 수많은  핍박과 박해 그리고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바울은 이러한 고난과 핍박에 아랑곳 하지않고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넉넉하게 감당했다는 것입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예수살렘에 환란과 핍박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고 했을때 바울은    “  24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 24 However, I consider my life worth nothing to me, if only I may finish the race and complete the task the Lord Jesus has given me--the task of testifying to the gospel of God's grace. 

 라고 했습니다.  그에게는 더 이상 죽음이 두려운 존재가아니었습니다.  그 이유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통해 ,  죽음이 가로막지 못하는  성자 하나님 되신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는 참된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오대양 육대주의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바울을 만나주신 것 처럼  한국땅에 코리안 드림을 위해 입국한 저와 여러분들에게  코리안 드림의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 주셨다는 사실을 믿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여러분들이 고국에 돌아갈 때 ,  사망의 문덕을 넉넉하게 넘으신  참되신 하나님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주심을 확신하며 금의환향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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