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설교(한영중)

성 경:롬7:1-13 제 목:로마서 강해

0 1,512 2017.02.03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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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경:롬7:1-13                          제  목:로마서 강해                     
                             
1 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율법이 사람의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2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났느니라
  3 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부라 이르되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케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지라도 음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
  4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
  5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6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7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어떤  부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남자는 모든일을 완벽하게 추구하는 완벽주의자 였습니다.    그의 부인인 처음에는 이러한 남편을 존경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남편이 두려워 지기 시작했습니다    남편은 가정생활에도 철저한 규칙을 시행하엿습니다.  그리고 규칙을 깨트린 식구들에게  엄격한 벌칙을 적용했습니다.    아내는 잘하려고 하면 할수록 오히려 실수를 더 많이 하였습니다 아내는  점차 모든 면에서  자신을 잃어 갔고  삶의 의욕을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아내는 깊은 열등감 속에  사로 잡히고 말았습니다  그녀의 삶은 한마디로 말하면 절망적이엇습니다

  그런데 그러던 어느날 남편이 죽어버렸습니다  처음에는  과부로 홀로됨이  큰 충격이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감에 따라서  소리없는 자유함이 밀려들어왔습니다    남편이 죽은 후 몇 년이 지나자  친구의권유로  다른 남자와 재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재혼한 이남자는 죽었다가 기적적으로 다시살아난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경험이 있는 탓인지  새로운 남편은 매사에  이해심이 많고 동정심이 많았습니다  아내가 실수 할때  그럴수 잇지 않느냐고  늘 따뜻한 위로를 베풀어 주었습니다

  이런 새로운 남편과의 관계속에서  이여인은 잃어버렸던 자신감을 되찿게 되었습니다  규칙이 없어도  그녀의 새가정은 따뜻한 질서가 있었습니다  그녀에게 있어서 더 이상 남편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었고 한없는 애정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새로운 삶의 활력을 찿았습니다    그녀는 이제 완전한 새로운 삶을 살고 있습니다 너무나 행복해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이야기가 누구의 이야기입니까?  바로 저와 여러분들의 이야기 오늘 본문의 이야기 인 것입니다  이 여인은 성도된 저와 여러분들이 예수님을 만나기전의 상황과 만난후의 상황을 묘사하고 있고  죽은 전남편은 율법이라고 생각을 하면 될것이고 그리고  그리고 새롭게 만난 이남자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생각을 하시면 될것입니다    교회의 범주안에 들어와 있는 사람들  즉 믿는 사람이든  그렇지 않는 사람이든간에 예수님을 확실히 만나지 못한 모든 사람들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규법은  율법입니다

  그들은 율법에 의하여 매인바된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이 하라고 하는 것은 할 수 없고  하지말라 라고하는 것은  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율법의 정죄를 피할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율법에 의하여 살아가니  양심의 가책은 더해가고  우리의 양심의 명령을 따라 살지못하는  자신의 천박한 삶의 모습을 볼때마다 삶에 있어서 절망감을 느낍니다 

  그러던 어느날  예수 라고하는 새남편을 만난것입니다  이제부터는 우리의 삶을  율법에 의하여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율법이라고하는 남편은 이제 죽은 것입니다    오늘 본문 4절에서는 율법에 대하여  청산된 관계를 가지고 있다 라고 정의 하고 잇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인생을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오늘 우리가 율법에 의하여 산다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와 산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어떠한 차이가 있을까요  이차이를 이해하는 것은  도덕과 신앙은 어떻게 다른가  혹은 흔히 말하는 종교와 기독교 본질과  어떻게 차이가 있는가  라고하는 기독교 신앙의 가장 중요한 명제를 우리에게 제시해 주고 잇는 것입니다    주어진 본문을 말씀을 통하여  율법과 그리스도를 조명해 보면서  우리의 신앙에서 참된 신앙의 가치가 정립되어  자유함을 누리시는 축복이 가득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1. 삶의동기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오늘 주어진 본문의  5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 라고 육신이라고 하는 단어가 등장을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부터 시작을 하여서  8장에 이르기까지  육신이라고하는 단어가 등장을 하는데    여기서 육신이라고 하는 말은  우리가 흔히 오류를 범하기 쉬운 “육체”라고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일 오늘 주님 앞에 나오신 저와 여러분들이  육신이라고하는 말을 이해를 하지 못하고  로마서에 대한 강해를 듣는다면  로마서 전체를 이해하지 못한다 라고 생각할수 있습니다

  육신이라고 하는 단어를 한마디로 정의를 한다면  우리가 성도가 되기전에  크리스천이 되기전에  우리속에 부패한 본성을 가리켜서  육신이다 라고할 수 잇는 것입니다  부패 했다는 것은 원래 선하게 창조한 하나님의 창조본연의 목표를 상실했고 선로를 이탈했다는 의미이지 창조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이육신의 특징은 한마디로 표현을 하면 자아중심적으로 모든 삶을 영위하는 것을 말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의  삶속에는  무엇이 있을까  그들에게는  높은 도덕적인 열망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양심대로 살고싶어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높은 도덕적 열망이나  양심을 추구하는 그들의 내면 깊은 곳에는  자아중심적인 삶  즉 자신을 높이기 위한 동기가 그속에 자리하고 잇다 라고하는 것을 살펴 볼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신적이지 않다 라고하는 것은  자아가  누구를 중심하느냐  라고하는 기준에서 중요한 분기점을 가질수 잇는 것입니다.  오늘 주어진 6절의 말씀을 보시면  우리 개역성경에서는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 지니라”고 기록을 하고 잇씁니다

 그런데 영어성경을 가지신 분들은  이렇게 기록된 것을 볼수 잇을 것입니다  But now by dying      But now  라고 하였습니다  이제는 이 아니라  그러나 이제  라고 하였습니다  이말은 앞의 문장과 역접의 관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어떻게 산다고요 육신에 있을 때  율법을 말미암는 죄의 정욕으로 살지 아니한다 라고하는 말입니다.    이제는 율법으로  육신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이전까지 얽매였던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살지 아니한다 라고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어떻게 산다고요  6절 중반절을 보십시오  “영으로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다 라고 ”말씀하고 잇씁니다

  보편적으로 자연인들의 삶의 동기가  높은 도덕적인 견지를 추구하며  양심에 근거해 산다면  우리 크리스천의 삶의 동기는 성령에 의하여 산다 라고 할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임재하셔서  주장하시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그분께 의탁하면서 산다 라고하는 것입니다  그분의 충만으로 사시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우리에게  오셔서  역사하시고 행하시는 가장 중요한 사역중의 하나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을 높여 드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증거하며  나타내는 것입니다 예수의 향기를 발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을 투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속에 예수님이 오시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기 시작하면  그 삶속에 새로운 변화가 일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삶의 동기와 삶의 목적이 달라집니다      어떻게 삶의 동기와 목적이 달라집니까?  크리스천 또한 높은 도덕적인 견지에 이르러야 합니다  그리고  깨끗한 양심의 소유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높은 도덕적 견지와  깨끗한 양심의 소유자가 되어야 하는  동기는  단순히  자신의 의를 드러내어  자신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내 삶속에 임하시고  나를 구원하신 주님을 기쁘게 하고 영화롭게 하기 위함의 동기가 된다 라고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성도의 삶의동기와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동기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육신적인 삶이 아닌 여라분들의 삶에 넘쳐나는 박수를 보냅니다      이러한 삶이 충만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2. 삶의 욕구가 다릅니다

  오늘 우리가 율법을 주인으로 하고 삶을 살 때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욕구는 무엇일까  오늘 본문 5절에서는  사도바울이  그것을 “죄악의 정욕”d이라고 정의하고 잇습니다  5절을 다시한번 읽어 보십시다 “우리가 육신에 있을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은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엿더니” 아멘
  이미 말씀을 드렷지만  율법은  그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율법에서 해방되었다고 해서 율법자체가 나쁘다 라고하는 것은 절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2절에는  율법의 본질에 대하여 규명을 해놓았습니다

 12절입니다 “이로보건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아멘  율법에는 결코 문제가 없다 라고하는 증명을 우리는 보았습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이러한 율법을 지켜야 하는 우리자신들인 것입니다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율법을 지키지 못한  우리의 연약성에 문제가 있다  라고하는 것입니다  그문제를 사도바울을  계속해서 로마서 8장과 이후에서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롬8:3절의 말씀을 다같이 한번 읽어 보십시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있는 육신의 모양아로 보내어 육신의 죄를 정하사 ”아멘    여기서 보면  율법이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지킬수 있는 능력을 가지지 못한 우리에게 문제성이 잇다 라고 지적을 하고 잇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육신의 연약성인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타락한 본성 때문에 율법대로 살수 없는 인간의 고민이 있습니다    율법은 우리에게 거룩하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들으면서도  우리는 추한 곳으로 달려갑니다    율법은 의롭게 되라고 말씀하고 잇지만  우리는 의에 대한 말씀을 들으면서 불의로 달려갑니다.  율법은 우리에게 선한 삶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이 선한 메시지를 들으면서도  우리의 발은 악을 향하여 달려갑니다  여기에 우리의 고민과 조절이 잇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율법은 하라  혹은 하지말라  라고하는 두가지 명령으로  요약될수 잇는데  특히 하지말라는 명령을 한번 살펴 보십시다  예를 들어서  더럽게 살지 말라 라고하는 메시지를 들으면 우리는 더럽게 살고 싶어 하는 본능이 일어납니다    불의하지 말라 라고하는 말을 들으면 우리는 불의를 실험하고 깊은 충동을 느낍니다  악은 그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하는 말씀을 들으면  우리는 그 악을 알고 싶고  그 악에 참여하고 싶은 호기심을 느낍니다  이것이 인간의 타락한  육신이요  본성이며 여기에 인간의 도덕적인  교육의 딜레마가 있는 것입니다

  항간에 한국 사회를 크게 멍들게 하고 병들게 하는 것은 청소년의 그릇된 성의식입니다  이미 그 문제는 벼랑에 서잇다 라고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심각하는 것은  누구도 다 아는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무분별한 인터넷의 보급.,  낙태를 유도하는  모자 보건법, 반 인륜적인 성불감증을 가진  성인들의 의식구조 이러한 복합적인 문제들이  이나라를 병들게 하고  썩어들어 가게 하는 것입니다  이일들을 위하여 일선 학교에서는  성교육을 부랴부랴 실시를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성교육을 통하여  학생들은 성교욱 자체에  흥미를 잃어 버립니다  그리고  코방귀를 뀌어버립니다

 학생들이 지난  성 의식은 이미  위험의 수준에 도달하고 타락의 일로에 들어섯는데  성교육을 하는 당사자나 교재는  이제 걸음나 정도의 수준이나  혹은  초보적인 단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잇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교육에 문제가 잇는 것인가    성교육 자체가 잘못된 것인가  아닙니다  성교육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다만 성교육을 받는 그러한 교육생들에게 있어서 인간의 부패한 품성을 소유한 저들에게 오히려  성에 대한 도착적인  충동감을  더욱 느낀다  라고하는 데 문제가 잇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교육은 젊은이들을 학생들을  더 타락하고 부패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문제가 무엇입니까?  인간의 본성  인간의 타락성입니다    그렇다면 성교육이 필요가 없는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교육보다  더 중요한 과제가  그 사람을 정말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고 그리스도인으로 만드는 것이 우선 시급한 문제라고 하는 것입니다  도덕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도덕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도덕에는 우리가 가야할길을 제시하지만  그길을 걸어갈수 있는 능력은 제시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아래서 정죄받고  절망했던 우리들이 어느날 삶의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라고하는 분을 구세주와 주님으로 만납니다

그때 우리안에는 새로운  삶의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알수 잇습니다  오늘 5절의 말씀에 보면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  율법으로 말미암아 죄의 정욕이 역사했지만  이상하게 율법의 메시지를 들으면서 우리는 죄악의 정욕의 지배를 받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새로운 열망이 생겼습니다  새로운 욕구는  사랑의 욕구라고 할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사람들에게 생기는 요구 새로은 열망입니다   

 롬5:8에서도 이미 이 사랑이 확증되었다 라고하였습니다  “우리가 아직죄인 되었을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아멘    우리는 십자가에서  가장 순수한 사랑을 발견합니다  나와 전혀 상관이 없던  그분이 나를 구원하시고 나를 새롭게 하시기 위하여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생명을 내어 놓았습니다    거기서 우리는 참사랑을 알았습니다

 우리는 이사랑을 받으면서  우리는 처음으로 이사랑을 부어주신  주님을 사랑하기 시작햇습니다  이것은 새로운 삶의 욕구인 것입니다  그 주님을 사랑하면서  우리는 주님을 기쁘시게 할 욕구를 갖게 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주님을 기쁘시게 할꼬 하고하는 노력이 우리속에 열망으로 자리하고 잇는 것을 볼수잇는 것입니다  이제는  삶에 대한 욕구가  세속적이고 정욕적인 육신적인 욕구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나를 구언하신  예수님을  기쁘시게  욕구로  바뀐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속에 이러한  욕구가 충만하십니까?  진심으로  그러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더 이상 육신을 쫓는 자들이 아닙니다  물론 육신은 아직도 우리안에서 우리를 괴롭힙니다  그러나 우리는 새로운 동기를 가지고 이제 내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을 쫓아 살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성령님이 보여 주시는 주님을 나도 보고  그 주님을 높이기를 원합니다  이렇게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한다는 것입니다    율법의 요구는 거룩하게 살고 의롭게 살고 선하는 사는 것이엇습니다

 율법을 붙들고만 있을 때 아니되지만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따라다가 보니까  내삶이 저절로 거룩해지고  의로워지고 선해집니다 이러한  욕구가 충만하시기를 주님의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셋째로 삶의 열매가 다릅니다
 육신에 있을 때  우리를 지배하고 잇었던 것은 죄의 정욕이었습니다  그 정욕은 5절에서 보면 사망을 위한 열매를 맺게 하엿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졋습니다      4절에 보면 “그러므로 네형제들아 너희도 그리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다니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십니다 전에는 단순히 도덕적인 삶이 내삶의 규범이었지만  이제는 다른 남편에게로 시집을 가서 하나님을 위한 열매를 맺는 삶을 살게 된것입니다  전에는 사망을 위한 열매가  이제는 생명을 위한 열매로  열매맺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이부분을 갈5:16절에 이렇게 소개를 하고 잇습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쫗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이 이루지 아니하리라”  우리가 성령을 쫗아 행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룰 필요가 없습니다 참으로 이제 중요한 것은 성령님의 세미하신 인도하심에 귀를 기울이고  그분의 인도를 받는 것입니다.  성령의 감동하심에 민감하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충만함이 날마다 넘치시기를 바랍니다

 저유명한 아사시의 성자  프란시가 구원받고 예수믿은지 얼마되지 않아서  길을 가다가 나환자를 만났습니다    가서 기도해 주고 싶은 충동이  있었는데  또 마음속에는  전염되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냥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성령님이 계속해서 마음속에 부담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기도를 햇습니다  “주님 제가 나환자를 그냥 지나간 것 잘못된 것입니까?  그러자 주님께서 ”너 왜 그냥 지나가느냐?    프란시스는 솔직히 대답했습니다  “더럽다고 느껴서 그리고 전염이 될까봐 그렇게 했습니다 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때 프란시스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너는 나환자 보다 나으냐?    너는 나환자 보다 더 더럽혀진 죄인 이었어  그런데  내가 너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고 사랑했단 말이야  프란시스는 그순간에  나환자보다  더 더렵혀진 냄새나는 죄인이었던 자신을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시고 사랑해주신  사랑을 깨닫고서  발걸을 돌이켰습니다  그는 나환자에게 돌아가서  그를포옹하고  아픈 상처를 만져주고  치료해주고  그를 돌보아 주었습니다  이때부터  프란시스 성자는  그가 알베르나 산록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그는 있느 힘을 다하여 “나의 사랑 나의 전부이신 예수여”라고하는 고백으로 생을 살았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러한 요구가 넘쳐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이주님을 날마다 삶속에서 만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권고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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